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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TV]타협의 수로 여야 이끈 김종필 전 총리… 92세로 타계

"박 대통령의 장례를 마친 뒤 며칠간 나는 청구동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격동의 무대에 막이 내렸고 나는 불 꺼진 텅 빈 무대에 남겨지고 말았다." ('김종필 증언록' 중앙일보)

1926년 일제강점기.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한 소년은 일제강점기와 조국 해방을 겪으며 왠지 모를 벅찬 꿈을 키웠다. 서울대 사범대에 들어갔다 다시 육군사관학교로 들어가게 된 청년. 그가 바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풍운아’로 불리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다.

고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던 그에겐 ‘킹메이커’ ‘2인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김 전리총리는 처의 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일으킨 1961년 군사정변을 계기로 정치무대에 본격 데뷔한다.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였기에 10·26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타협을 중시한 정치인이었고 정치적 고난과 위기의 순간을 맞았을 때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타협의 정치로 출구를 찾곤했다. 그는 몇 차례 새로운 당을 만들었고 필요에 따라서는 합당을 통해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에게 정당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증언록에서 그는 "쉬이 무너지고 쉬이 도망가고 쉬이 좌절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정당이었다. 그 사실을 슬프게도 깨우쳤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어떠한 도전에도 실의에 빠지거나 주저앉아 않았다. 3당합당을 통해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DJP연합을 통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킹메이커'로 활약했다. 군부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필요할 때는 민주화 세력과 힘을 합치는 묘수를 뒀다.

쉽지 않은 성사였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연합은 보수 측으로부터도 많은 저항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그는 "내가 아니면 박 대통령이 DJ에게 진 빚을 갚을 사람이 없었다"며 "나는 역사를 봤고 현실을 직시했다. 미래를 위해 DJ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영원한 2인자처럼 보였지만 그는 더 큰 미래를 위해 움직였던 킹메이커의 1인자였으며 정치의 산 증인이었다.

23일 오전 92세의 일기로 타계한 김종필 전 총리는 고향인 충남 부여군 외산면 가족묘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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