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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 꿈의 흔적이 있는 정동…①이성계의 꿈 '신덕왕후를 향한 사랑'이 있던 곳

태조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1396년 8월에 숨졌다.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이었을 때 만났던 강씨. 이성계가 우물가 물을 달라고 했다가 강씨가 버드나무 잎을 띄워 물을 건내준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이성계가 체할까봐 잎을 띄웠다는 강씨는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가 됐다.

강씨는 이성계에게 버드나무 잎만 띄워줬던 처녀는 아니었다. 강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도 초기 정치 영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고려의 권문세가였던 강씨는 집안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조선 건국 4년 후, 신덕왕후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죽은 왕비에 대한 애틋함을 간직하고싶었던 모양인지 태조는 왕비의 묘를 사대문 안에 들여놓게 된다. 당시 도성 안에 묘지를 둘 수 없는 법이 있었음에도 무덤 공사를 강행한다.

그러나 정릉은 현재 원 위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동에서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사라져버렸다. 어떤 연유에서일까?

그의 묘는 1409년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으로 이장됐다. 태조의 아들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눈엣가시였던 새어머니 신덕왕후의 묘를 이장시켜버린 것이다.

도성 내에 묘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길 만큼 신덕왕후를 끔찍히 사랑했다던 태조 이성계와 굳이 새어머니의 묘를 파헤쳐 지금의 정릉으로 이관하고 묘석을 분해해 청계천 주춧돌로 쓰게 만든 이방원. 이들의 갈등의 중심엔 정쟁이 있었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의 소생이었던 이방원(태종)은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이 세자가 되자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세자 방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권력을 위해 이복동생을 처단했던 그에게 신덕왕후의 릉은 다시 처단하고 모욕해야할 대상이었다. 그는 신덕왕후의 제사를 폐하고 즉위 9년(1409)에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 자리로 릉을 옮겼다. 정릉에 있던 건물은 다른 건물인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했고 무덤을 없애버렸다. 석인은 땅에 묻어버렸고 이듬해엔 근방 청계천의 광통교의 돌다리로 사용했다.

정릉의 흔적은 현재의 정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국 대사관 혹은 구 러시아 공사관 근처라는 설만 있을 뿐이다. 조선 최초의 왕비였던 신덕왕후의 릉은 현종 10년(1669)에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고 왕비로 복권되면서 현재의 성북구에 있는 정릉으로 회복됐다.

최도 정릉의 크기는 1만평으로 추론되고 태조가 지극정성으로 왕비를 생각하며 명복을 빌었다던 흥천사(興天寺)도 1510년 불교배척운동으로 불타 없어졌다. 정동을 가히 다 덮을 만큼 컸던 정릉과 흥천사. 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점점 궁의 원형이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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