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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①대학로-성균관 유생들의 고뇌·우암 송시열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

대학로는 많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대학가, 소극장 최대 집결지, 최대 규모의 공연이 이루지는 곳은 이 곳뿐이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이화동, 명륜동 일대의 지역.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큼지막한 마로니에와 플라타너스가 하늘을 덮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대학로에서 미아리고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큰 성이 나온다. 조선시대 사소문 중 하나였던 혜화문. 혜화문에서부터 서울대학교 병원 쪽까지 난 큰 길이 대학로다. 대학로 좌우로 난 작은 길들에는 송시열의 집터부터 한국 최초의 대학가, 연극의 샘터, 수도원이 숨어있다.

2004년 서울시는 작은 길들을 묶어 '대학로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면적 약 44만㎡. 대학로를 중심으로 동숭동, 혜화동, 명륜 2가, 명륜 4가, 이화동, 연건동 일대가 포함돼 있다.

1.①대학로-성균관 유생들의 주막터와 여진족의 출입문이 있던 곳

창덕궁과 혜화문 사이, 조선이 개국하면서 발전시킨 성균관과 문묘가 원형을 간직한 채 서 있다. 유교에서 추앙하는 공자와 그의 제자를 모시는 곳인 문묘는 유학 정신을 받드는 성균관과 항상 붙어 다닌다. 지금도 혜화동 대학로에서 조금만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걸어가면 문묘와 성균관 입구를 볼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있던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유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 200여 명(1429년 이후)의 유생들은 생원, 진사의 자격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선발됐다. 전국에서 유생이 되기 위해 몰려온 성균관. 지금의 대학로 이전에 유생들의 대학로가 그 터를 잡고 있었다.

일제시대 이후 성균관대학교로 바뀐 성균관. 500여 년 동안이나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 교육기관에 걸맞게 청년들도 들끓었다. 그 앞 골목은 지금은 아스팔트로 뒤덮였지만 아직 옛 흔적을 간직한 곳이 있다. 바로 대명길과 소나무길. 성균관 입구에서 혜화역으로 내려오는 길은 예전엔 개천이 흐르는 주막터였다고 한다. 시험에 낙방하거나 순방한 유생들이 모여 막걸리를 마시던 주막터였고 또 유생들의 일손들이 부락을 이뤄 살던 촌이었다

성균관에서 미아리고개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비록 재건되었지만 1397년에 드러선 조선의 사대문 중 하나인 혜화문이 우뚝 서있다. 혜화문의 역사도 기구하다. 여진족들이 조선에 물건을 팔거나 당정에 협의를 하러 올 때 드나들었다던 혜화문. 여진족들이 청나라를 세우고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영은문(지금의 독립문자리)으로 드나들면서 혜화문은 급속히 퇴락했다. 지금의 혜화문은 1939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 1992년 복원됐다.

대학로엔 송시열 선생의 흔적도 남아있다. 앵두꽃이 만발하던 명당 자리였다던 혜화동과 명륜동은 조선시대 때 양반들의 대저택이 서민들의 집과 섞여 있던 곳이었다. 효종 때의 유학자 우암 송시열. 비록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지만 주자학의 대가이자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빌라가 빼곡히 들어선 명륜동 한 켠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손바닥만한 글씨가 암벽에 새겨져 있다. 남들이 뭐래도 자신의 길을 가겠다던 송시열의 뜻이 바위에서 아직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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