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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마을의 기록으로 역사를 만나다…②진관동문화재

진관동은 겉으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신도시로 보이지만, 마을 곳곳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먼저, 아파트 단지 안 작은 공원에 세워진 비석은 조선 영‧정조 시대 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비석은 1781년 정조가 세운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로 연잉군 시절 영조의 일화를 다루고 있다.

선왕(先王) 숙종의 능인 명릉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연잉군은 금암참(지금의 구파발 일대)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백성 하나가 소를 훔쳐 달아나다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연잉군은 이를 가엽게 여겨 참장에게 "필시 흉년에 춥고 배가 고파 도둑질을 했을 것이니 선처하라"고 명한다. 이 같은 선정을 베풀고 궁으로 돌아온 날 왕세제에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후에 정조가 명릉 행차를 다녀오는 길에 이를 기념하고자 비를 세우게 했고, 종묘와 같이 하마비를 세워 예를 다하게 했다. 이는 숙종이 연서역에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조별서유기비를 본뜬 것으로, 행차로를 일종의 왕의 길로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역참을 연구한 조병로 경기대 사학과 명예교수에 따르면, 실제 이 지역엔 왕이 머무는 행궁까지 지어졌다 한다.

현재는 기념비만 남아 서울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 관리중이다.

또 다른 역사 기록은 천년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진관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지난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유물이 발견됐다. 초기 태극 문양이 그려진 태극기와 1919년 상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과 신대한 등 독립운동계 신문 6종 20점이 나온 것이다.

이는 당시 불교계 독립운동가 중 진관사에 머문 기록이 있는 백초월스님이 숨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관사를 일종의 연락본부로 하여 상해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며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관사 주지인 계호스님도 "백초월 스님이 모든 군자금이라든지 보시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면서 큰 역할을 했다"며 "의주로와 가까워 정보를 전달하기 적합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실제 진관동 파발 시설인 금암참과 진관사가 함께 있는 마을이다.

또 진관동은 이밖에도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보물 657호), 토속신앙 전통이 남아있는 금성당 등 다양한 역사 유적을 품고 있다. 은평뉴타운 개발 과정에서는 조선시대 분묘군(墳墓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역사 유적과 이야기들을 품어온 셈이다.

이에 은평구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을 만들어 진관사의 사연은 물론, 파발을 비롯한 금암참 이야기, 조선시대 무덤과 장례문화 등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김시업 은평역사한옥박물관장은 "새로운 마을이 만들어지고 개발이 된다더라도 진관동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와 역동적이었던 생활의 모습을 발굴하고 되살려 나가고자 한다"고 그 의의를 설명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 골목이야기 시리즈 '진관동'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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