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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①연희동-조선의 수도 후보에서 누에 치는 뽕밭으로

'복이 퍼지는 동네'라는 뜻의 연희(衍禧)는 세종이 내린 이름이었다. 연희동은 왕들이 머물던 연희궁이 있던 곳이다. 조선 초기 이궁이던 연희궁은 연세대학교 정문 부근 또는 연희동 194번지 일대(연희 브라운스톤 뒤편)에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대동여지도 등지에 연희궁이 표기된 것을 보면 꽤 오랜 시간 동안 궁의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자 표기는 문종 때 연희궁(延禧宮)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졌다.

"세종 2년 정월 무악 명당터에 궁을 건축하라는 왕명을 내려 공사에 착수했다"(세종실록)

조선 초 연희궁 인근은 조선의 수도 후보지로 거론된 명당이었다. 개국공신이었던 하륜은 무악 천도를 적극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대신 이 곳에는 왕이 머무르는 별궁인 서이궁(西離宮)이 만들어졌다. 세종은 부왕인 태종이 머물 궁으로 서이궁을 선택했고 세종 7년 이를 중건해 연희궁(衍禧宮)으로 개칭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도 연희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세종은 궁궐터 근처에는 뽕나무를 심어 잠실도회도 만들었다. 당시 고부가가치 산업인 비단을 만드는 누에를 길렀던 것이다. 아직도 안산에 가면 뽕나무 잎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니 당시 뽕밭의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세종의 살뜰한 마음이 곁들어 있던 연희궁은 연산군 때 술이 넘쳐나는 연회장으로 바뀌고 만다. 연산군 11년(1505년) 궁을 개축해 궁녀들과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콘크리트 도로로 복개됐지만 당시에는 하천이 흐르며 뽕나무와 과일나무가 무성한 안산 자락이 뒤에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정궁과도 멀지 않아 연회장으로서의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연희궁은 연산군 때부터 이궁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대신 인근 마을이 ‘궁뜰’이라 불리면서 왕과 관련된 이들이 있던 곳으로 남는다. 이 곳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엄마인 영빈 이씨의 묘 수경원이 있었고 장희빈 생가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연세대학교 내에 수경원의 정자각과 비각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연희 1동에는 장희빈이 머리를 감았다는 우물터가 재건돼 있다.

이 곳은 이후 고종 4년(1867년) 북부 연희방 연희궁계로 분류됐다가 1914년 연희리로, 1946년에 지금의 연희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연희동 행정구역은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이며 면적은 3.05㎢ 인구는 2018년 10월 기준 1만 8702명으로 집계된다. 주요 명소로는 △장희빈 우물터 △104고지전적비 △사러가마트(한국 최초의 슈퍼마켓) △연희문학창작촌 △화교가 운영하는 중식당(진보, 이화원 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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