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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②연희동-서울 수복 최대 격전지 '104고지'…그 옆에 우후죽순 들어선 판잣집들

연세대학교의 이름은 연희동에서 유래됐다. 연희전문학교(1915년 설립)와 세브란스의과대학(1885년 설립)이 통합되어 1957년부터 연세대학교라는 교명이 사용됐다. 1900년도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개발되기 전의 연희동 풍경은 지금의 경기도 외곽처럼 산과 논밭이 많은 동네였다.

해방 직후 연희동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연희1동 서연중학교 뒤편 궁동산 초입에 있는 언덕은 바로 6·25때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하게 된 최대 결전지인 104고지다. 능선의 높이가 104m라 104고지로 일컫어지는 이 곳은 해병대 178명이 전사하고 북한군 175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장소다. 이 전투로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다. 현재는 고지 위에 나무 바닥을 올려 기념비를 세워놓고 당시를 기념하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연희동 일대는 시체가 널려 있었고 가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홍제동 쪽이랑 외국인학교 근처엔 한국전쟁이 끝나고 시체가 많았어요. 저희 할머니 같은 경우에도 104고지 전투 때 날아온 총탄에 허벅지에 흉이 남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임수일(연희동에서 60년 넘게 거주))

연희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 주민들을 만나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풍경을 물어보면 입을 모아 처참하고 가난했다고 증언한다. 1950년대에 연희동에서 태어난 임수일씨는 연세대학교 북문과 연희 3동쪽에 시신이 많이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연희동 주민들은 주로 궁동산과 안산의 밭에서 파와 배추를 심어 아현동 시장에 가서 파는 1차산업에 종사했었다고 기억한다.

1960년대까지 연희동은 궁동산과 안산 지대를 타고 무허가 판잣집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60년대부터 연희동에 정착한 이봉근씨는 당시 산동네가 설립될 때 건설업에 종사하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는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서울에 터전을 잡기 위해 연희동 산 인근에 큰 벽돌을 쌓아 반나절만에 집을 지었다고 했다. 주인 없는 땅에 집들이 만들어지고 대규모 판자촌 지대가 형성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산 아래 평지에도 지금처럼 큰 주택들은 없었다.

“시골 사람들이 보따리장사처럼 왔죠. 다 대폿값 얻어먹고 우리가 살게끔 만들어준 집들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동네에 마을이 형성됐죠. 꼭대기 빼고 다 하코방이었어요.” (이봉근(연희동에서 50년 넘게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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