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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①부암동의 유래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둘러싸인 부암동은 부침바위(付岩)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약 2m 높이의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만큼 문지르고 난 후 손을 뗐을 때 돌이 떨어지지 않으면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1970년 자하문 길이 확장되면서 지금은 없어졌다.

부암동은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동네다. 이 중에서도 무계원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통 한옥 공간으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터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다. 조선시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본 도원과 흡사한 곳에 정자를 세우고 이를 '무계정사'라 했다. 이곳에서 그는 글을 읊고 활을 쏘며 지냈는데, 1453년 역모로 몰려서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이곳도 폐허가 됐다.

무계원에서 북쪽으로 약 5분 정도 걷다 보면 흥선대원군의 별당이었던 석파정이 있다.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김흥근의 별서였는데 그때는 집 뒤에 三溪洞’(삼계동)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이후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바위(石) 언덕(坡)이라는 뜻의 석파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대원군의 아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석파정에서 왼편 계곡 위로 가면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는 누각이 있다. 그 뜻을 풀이하면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뜻으로, 가을날 이곳을 찾는다면 단풍에 휩싸인 절경을 볼 수 있다.

부암동에서 홍지동으로 가는 길에는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성문 및 성곽으로, 1715년(숙종 41)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건립됐다. 200년간 탕춘대성의 성문 역할을 해온 홍지문은 1921년 홍수로 붕괴됐으나 1977년에 이를 수습, 복원한 것이 지금의 홍지문이다.

탕춘대성은 약 100여m 떨어진 산봉우리에 있던 연산군의 놀이터,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탕춘대성에서 탕춘대터 사이에는 세검정이 있다. 세검정은 인조반정 때 이귀·김유 등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결의하고 칼날(劍)을 갈고 닦았다(洗)는데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지금은 이 지역의 일대(부암동·홍지동·신영동·평창동)를 통틀어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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