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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대한 독립을 세계에 알린 이방인, 앨버트 테일러

1919년 3월 1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 오늘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대한 독립 선언'을 세계에 알린 한 미국연합통신의 기사의 사연은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의 위치한 붉은 벽돌집에서 시작된다.

힌디어로 '기쁨', '이상향'을 뜻하는 이 집은 미국 광산업자였던 앨버트 W.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살았던 집으로, 그 주인이 밝혀지지 않아 한 때 대한매일신보 사옥 혹은 베델의 집으로도 추측되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2006년 브루스 티겔 테일러가 자신의 부모님이 살았던 딜쿠샤를 찾으면서 비로소 제 주인을 찾게 되는데, 동시에 3‧1운동과 테일러가(家)의 인연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19년 2월 28일 메리 테일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 브루스를 낳았는데, 그 때 마침 한 간호사가 브루스의 요람에 인쇄뭉치를 몰래 숨겨두었다. 우연히 이를 발견한 앨버트 테일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한 독립선언서잖아!"

마침 미국연합통신사(AP통신)의 임시 한국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서둘러 기사를 작성해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윌리엄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보냈고, 얼마 후 무사히 미국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3월 12일자 신문에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며 3‧1운동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앨버트는 1923년 행촌동에 딜쿠샤를 짓고 '이상향'을 꿈꾸며 기자 활동을 이어갔지만,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해 일제의 감시를 받다 결국 이듬해 메리와 함께 강제로 추방당하게 된다.

한국을 그리워한 앨버트는 해방 후 미 국방부에 '통역사로 한국에 가게 해달라'며 편지를 쓰는 등 노력했지만,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해 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치되었다.

자칫 역사 속에 묻힐 뻔했던 그의 사연은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딜쿠샤를 찾으며 전환점을 맞았다. 브루스를 통해 메리 테일러가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글(이후 '호박목걸이'란 이름으로 출판)과 당시 사진 등이 전해진 것. 덕분에 약 20년간 테일러 부부가 살았던 딜쿠샤의 역사적 가치까지 빛을 보게 되었다.

지난 2016년 앨버트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가 조부모의 유품들을 한국에 기증하면서 딜쿠샤는 지난해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고, 오는 2020년 시민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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