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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영욕의 시간을 지나온 골목…장충동의 역사

서울 남산 아래에 위치해 공원과 대학가로 유명한 장충동은 그보다 더 다양한 근현대 역사를 골목 안에 품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11방의 하나인 명철방(明哲坊)에 속했던 이 지역은 한양도성 성곽을 중심으로 형성돼, 도성 수비와 방어를 담당한 남소영(南小營‧어영청의 분영) 중심의 국가 관리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은 20세기 들어 굴곡진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는 광무4년(1900년) 남소영 자리에 을미사변으로 순사(殉死)한 충신과 장병들을 위한 제단을 만들게 했고,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의 희생자 역시 함께 추모하게 했다. 그리고 그 제단을 가리켜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의 장충단(奬忠壇)이라 명명했다.

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마친 이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추모한다'는 근대 국가의 의미를 담긴 것으로,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일종의 국립 현충원 같은 공간이 조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가 현충 시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장충단의 제사를 금지시켰고, 1919년엔 이 지역을 공원으로 만들어 제단을 헐어버린다.

마을 이름 역시 본정(지금의 충무로), 삼판통(지금의 후암동) 등과 더불어 일식 이름인 사헌정(四軒町)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 사헌은 에도시대 영주를 지키던 동서남북의 네 무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의 대상이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일제는 1932년 장충단 자리에 을사늑약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을 딴 사찰 박문사(博文寺)를 짓고, 그를 추모하며 대한제국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려 한다. 심지어 경희궁 흥화문을 뜯어와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거나, 강제 철거한 광화문의 자재들로 부속건물을 짓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시기까지 이어온 국가 공간을 일제의 정신지배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 성곽 마을은 다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일본인들이 철수하며 일제 건물들 역시 허물어졌고, 공터가 된 자리에선 남은 비석과 함께 대한제국과 충(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장충단 비석은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 의미만큼은 그대로 이어져 사헌정으로 불리던 마을은 1946년 10월 1일 '장충동'으로 돌아온다.

이어 이 마을 역시 산업화, 현대화를 거치며 새 골목과 다양한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변화를 맞지만, 충(忠)의 의미만큼은 그대로 남았다.

현재는 장충동 1,2가와 묵정동 일부가 통합돼 행정명 장충동으로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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