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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서울의 기억을 담아온 골목…사직동 역사

서울의 한양도성 서쪽, 경복궁부터 돈의문 사이에 위치한 사직동(현재의 행정동 기준)은 조선의 건국시기부터 현대까지 서울 역사의 중심을 지나왔다.

1392년 건국 후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법궁인 경복궁 서쪽에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을 모시는 제단을 두어 동쪽의 종묘와 함께 국가의 정신적 축으로 삼았다. 이 때 만들어진 사직단이 마을의 유래가 되었다.

조선 초기 사직단이 국가의 제사 공간으로 자리를 잡으며 마을은 빠르게 성장한다. 양반뿐만 아니라 관청일을 돕는 중인과 평민들이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고, 인달방, 의통방, 적선방 등의 여러 마을이 생겨나 자리를 잡았다.

조선 중기를 지나며 이 지역엔 왕의 공간, 궁궐도 들어서게 된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불에 탄 창덕궁을 꺼려한 광해군은 '왕기가 서렸다'는 정원군(인조의 아버지) 집터에 새 궁을 짓고,'경덕궁'이라 하여 머물고자 하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는 동안 경덕궁에서 정사를 돌보았는데, 그 때부터 왕이 머무는 이궁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영조는 경덕궁의 '덕(德)'자가 정원군의 시호와 같다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고, 창덕궁과 경희궁을 옮겨가며 정사를 돌보았다. 경희궁을 특히 아꼈는데, 생을 마감하기까지 18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경희궁은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왕이 머물렀고, 창덕궁과 함께 사실상의 법궁 역할을 했다.

사직동 지역은 근대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도 겪는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는 사직단의 제단만을 남겨둔 채 신을 모신 신주와 신실을 허물고는 '사직공원'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 경희궁을 모두 허물고 그 자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워 조선의 기억을 철저히 지우고자 한다. 조선이라는 국가를 상징하는 공간을 철저히 유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제의 만행 속에서도 개화기 전후로 자리잡은 마을과 골목은 바뀌지 않았고, '기억'만큼은 지켜낸다. 광복 후 1946년 우리식 동명을 찾으면서 조선의 기억을 담은 마을 이름이 돌아온 것이다.

사직단을 비롯, 조선과 관련된 이름을 토대로 마을은 사직‧필운‧내자‧내수동(이상 인달방 지역), 통의‧체부(이상 순화방 지역), 적선‧도렴‧당주동(이상 적선방 지역)으로 나뉘어 되살아났다.

경희궁이 있던 자리엔 사라진 돈의문의 기억(세종 때 돈의문을 옮겨 지으면서 '신문'이라 불렀다.)을 살려' 새문 안쪽 마을'이라는 뜻의 신문로란 이름이 지어졌다.

다시 골목은 서울의 산업화와 도시화마저 받아들이며 변화를 맞는다. 마을의 현대화에 따라 행정개편이 이뤄졌는데, 1975년 필운‧체부‧내자동을 시작으로 1977년 통의동과 적선동, 1998년 신문로 1,2가와 도렴‧당주‧내수‧세종로동이 사직동에 편입되었다. 다만, 조선시대부터 지켜온 마을의 전통만큼은 살려 법정동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이 지역의 행정동은 사직동이며, 법정동은 12개동으로 유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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