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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실패사용법]②'탁구여왕' 양영자 "지독한 아픔 없었다면"

21대10. 금메달이 확정되자 관중석에선 뜨거운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두 주인공은 기쁨의 포효도, 감격의 눈물도 없었다. 둘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을 뿐이다. 88서울올림픽 탁구 여자복식에서 '강호' 중국을 꺾고 최정상에 오른 양영자-현정화.

"'우리가 해냈다'는 기쁨보다는 '기대에 보답했다'는 안도감이 더 컸어요. 정화와 저는 86아시안게임 때부터 호흡을 맞췄죠. 그때 단체전에서 금메달 따고, 87세계선수권대회서도 복식 금메달을 땄어요. 그러다 보니 매스컴에서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어요."

양영자 대한체육회 꿈나무 유소년 탁구감독(55). 그는 탁구인생 최정점에 올랐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1981년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1983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한국최초 단식 은메달, 1986·87 메달행진에 이어 88서울올림픽 금메달까지. 양 감독이 써 내려간 '승리의 역사'는 화려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인생의 낙오자'처럼 보낸 시간이 있었다.

◇지독한 우울…"세상의 종말이 올 것 같았다"

'탁구여왕' '메달 보증수표'로 통하던 그는 1989년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식 치른 뒤 갈수록 마음이 공허해졌다. '뭘 해야 하나' 두려움도 엄습했다. 제일모직(현 삼성생명) 코치로 선수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지도자로서 무력감만 느꼈다. 은퇴 이듬해엔 어머니가 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상심이 컸죠."

상심은 거대한 우울증으로 변해 그를 덮쳤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듯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렸어요.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였죠. 해 뜨는 게 싫어 어두운 방안에만 갇혀 지냈어요. 어린 조카가 새언니에게 '엄마, 고모는 왜 저렇게 짐승처럼 살아?'라고 하는 얘길 듣기도 했고요.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었어요."

◇그 시간이 없었다면 몰랐을 '패자의 마음'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옆에서 함께해준 사람들 덕분이었다. 성심성의껏 상담해준 정신과의사,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감정기복을 묵묵히 받아준 남편이 있었다. 양 감독은 우울증 앓았던 2년의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아픈 실패의 경험"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었다"고도 했다.

그 '아픈 실패의 경험'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예전엔 아픈 사람 보면 '왜 저렇게 아파하지? 참고 잘하면 될 텐데' 생각했죠. 제가 혹독하게 아파보니 다른 사람의 아픔이 느껴지게 됐어요. 우울증을 겪지 않았다면 '나'만을 위한 삶, 이기적인 삶을 살았을 거예요."

양 감독은 우울의 긴 터널을 통과하며 자신이 얼마나 '나 중심적인 사람'인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국가대표 선수로 오직 금메달만 향해 달려왔어요. 그 목표만 향해 살다보니 제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이 없었죠."

'인생의 겨울' 지나며 비로소 삶 곳곳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패(敗)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쓰라렸을까, 아프고 외로웠을까.' 아픈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고 또 돕고 싶어졌다. 그랬기에 그 아픔을 기꺼이 끌어안고자 황량한 몽골 땅으로 들어가 15년을 선교사로 지낼 수 있었다.

◇'탁구감독'으로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

양 감독은 선교사로서 인생 2막을 마치고 2012년 귀국했다. 맡게 된 일은 '탁구 꿈나무'들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일. 한국탁구를 이끌어갈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자세는 무엇인지 물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승리자'라고 늘 이야기해요. 20명이 참가한 시합해서 18패가 된다 해도, 남은 한 게임이라도 이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임하라고요. 빛을 보기 위해 끝까지 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하는 것 자체가 빛나는 삶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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