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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TV]"유미와 한 약속 지켜 다행"… 반올림 '1023일'의 기록

"유미를 산재처리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삼성 직원이 '아니 아버님이 이 큰 회사 삼성을 상대로 해서 이기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때부터 시작됐다. 속초에서 택시업을 하며 길러낸 딸 황유미를 2007년 봄에 잃었다. 삼성 직원은 A4용지를 절반으로 접은 용지를 그에게 내밀고 사인하라고 했다. 보상금 5천만원을 약속했지만 막상 돌아온 건 백만원짜리 수표 다섯 장이었다. 치료비만 수천만원이었다. 막막했다.

"너무 억울해서 방송국에 전화를 했어요. 우리 유미가 백혈병 걸려서 동료는 죽고 유미도 위태로운데 방송해달라고 하니까 삼성에다가 공문을 보내서 거기서 백혈병이 걸렸다는 증거를 가지고 오래요."

방송국도 당시 진보성향의 정치권도 모두 상기씨 말을 묵살했다. 딸 유미의 병은 악화됐고 삼성은 외면했으며 세상도 도와주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알리느라 백발이 된 상기씨는 아직도 죽음의 순간을 말할 때면 떨렸다.

"유미가 죽었거든요. 제가 운전하는 택시 뒤에서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고속도로 위였거든요"

전날까지도 연락이 안 되던 삼성 직원은 유미 장례식장을 어찌 알았는지 쥐도새도 모르게 와있었다고 한다. 모든 걸 다 해결해주겠다는 직원에게 침묵했다. 장례를 치른 후 며칠 후 직원이 속초 횟집으로 불러냈다.

"반도체 공장에서는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유미 병은 개인적인 질병이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처음으로 욕을 하고 나와버렸어요."

그리고 11년. 그가 2007년 11월에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든 후 2018년 7월 24일 삼성이 조정위의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하겠다고 밝힐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아직은 질병지원보상안과 삼성전자 측의 사과 등을 담은 중재안만 합의된 상황이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아무도 듣지 않던 소리에 세상이 귀 기울여주기 시작했다. 막막했지만 그래도 그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가장 최근까지 제일 길게 이어온 노숙 농성. 강남역 8번 출구 삼성 사옥 앞 건물의 그림자보다 훨씬 작은 2평의 농성장. 반올림 지킴이들과 삼성 산업재해 피해자들, 황상기씨는 이 곳을 한 번도 비워놓지 않았다. 그렇게 1022일이 흘렀다. 세 번의 겨울과 여름을 났다.

"영하 17도에 비닐 하나 덮고 있을 때도 힘들었지만 햇볕 내리 찔 때가 정말 힘들었어요. 그럴 땐 강남역 지하상가에 들어가 있기도 했어요."

"지나가던 보수정권 지지자가 저한테 삼성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면서 왜 삼성 좋아서 들어가서 병 걸린 걸 삼성 탓하냐고 삿대질도 많이 했어요. 경비원한테 두들겨 맞기도 하고요."

순박한 강원도 사투리를 쓰며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는 그였다. 몇 날 며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고 어떻게 대응했다는 걸 거의 모든 날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절실했다.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냐 묻자 그는 한번도 없었다 말했다.

"유미가 병에 걸려 힘들게 싸울 적에 약속한 게 있어요. 유미가 걸린 병은 개인적인 병이 아니고 회사랑 관련 있을 거라고요. 꼭 밝히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유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억울한 사람들, 유미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 소원을 풀어줄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라는 말을요."

농성장을 지켰던 반올림 지킴이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술집과 음식점들의 형형색색 불빛이 아찔하게 비추는 강남역, 어쩌면 매번 지나쳤을 수 있는 작고 초라한 농성장에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반올림하려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서있던 셈이다. 산재 피해자들이다. 농성 도중 사망한 피해자들만 해도 수십명이었다.

이 날(24일) 강남역 인근 반올림 농성장은 그래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5일에는 1023일 만에 농성장을 철거할 예정이다. 황상기씨는 이날 오전 서대문구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간 제2차 조정(중재) 재개를 위한 중재 방식 합의 서명식'에 참석하고 여기 농성장으로 왔다.

"정부도 회사도 그렇고 노동자와 농성하는 사람 모두와 소통하는 길이 회사가 살아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한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소통입니다."

황씨 옆에는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악성 뇌종양에 걸려 장애 1급이 된 한혜경씨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다. 모녀는 오랜만에 웃고 있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소뇌가 손상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한혜경씨. 말보다는 눈으로 말하는 듯 했다. 또렷한 눈동자로 한씨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바로 문제를 말하지 않았어요. 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문제가 있을 땐 위험성을 바로 말해줬어야 해요.

11년 만에 열린 소통의 창구. 아직은 권고안과 중재안을 마련하는 중간 단계. 그래도 조정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삼성전자는 약속했다. 조정위는 두 달간의 중재안 마련 과정에 착수했다.

시간이 지나버렸고 피해자도 쌓여버렸다. 반올림 추산 삼성에서의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118명, 산재 신청자는 96명. 갈 길이 멀지만 발걸음은 예전보다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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