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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TV] 경복궁 서쪽 길목 '영추문'은 왜 43년간 봉쇄돼야 했나

선 정궁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총 4개가 있었다. 남쪽의 광화문, 북쪽 신무문, 동쪽 건춘문, 그리고 서쪽의 영추문이 경복궁 동서남북을 연결하던 길목이었다.

이 가운데 서촌 인근의 영추문(迎秋門)이 한동안 출입이 통제됐다가 6일 다시 전면 개방된다. 197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이후 청와대 외곽 경호를 맡은 수경사 30경비단이 주둔하면서 통재됐으니 그 한동안이 무려 43년의 세월이다.

도대체 영추문엔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조선 건국과 동시에 경복궁이 만들어지면서 백성들은 서울의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창의문을 이용해야 했다. 지금의 영추문 쪽에서 효자로를 지나 세검정으로 이어지는 길은 언제나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 길은 겸재 정선의 창의문도에도 아름답게 묘사된다.

궐내각사를 출입했던 문무백관들이 드나들던 북적거리는 길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영추문 인근은 맑은 개천이 흐르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비록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탔지만 인근은 조용했나 보다. 추사 김정희와 왕자 시절의 영조가 살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영추문이 헐렸다고 하지만 근처의 길은 완벽히 통제되는 길은 아니었다. 비교적 자유롭게 시민들이 드나들고 전차가 다녔다.

그러던 영추문과 인근 효자로가 봉쇄된 건 단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바로 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 북한의 특수요원 31명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을 살해하기 위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 사살당했다. 이 사건 이후로 영추문은 봉쇄됐고 효자로는 엄격히 통제되기 시작한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1·21 사태 때문에 서울 도시 구조가 전면적으로 개편됐다 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청와대를 요새화할 필요가 있었다"며 "북악 스카이웨이를 만들어 청와대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고 영추문을 봉쇄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강남을 개발하고 남산 터널을 방공호 개념으로 만들게 됐다고 덧붙였다.

영추문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시민의 발길이 통제되는 구역이었다. 인근 주민이 아닌 이상 거의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북한 특수요원의 침입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방문도 막은 셈이다.

경복궁 관리자는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더욱 경비가 삼엄했다 회고했다. 시위대가 청와대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29일, 43년 만에 전면 개방을 앞둔 영추문 앞은 공사로 분주해 보였다. 영상을 찍기 위해 문을 열어달라 요청하자 경찰은 망설임 없이 슬쩍 문을 열어줬다. 1년 전엔 장갑차로 가득 찬 효자로 거리에 지금은 한복을 입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느리고 평화롭게 걷고 있었다.

"전 세계의 어느 나라도 그렇게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집무실을 두는 곳은 없다"

안 교수는 현재 청와대 위치가 조선총독부 총리의 집이 있던 곳이라 더욱 지배적인 성향이 강하다 말했다. 영국 총리의 관저인 다우닝가와 독일 총리의 베를린 청사는 시민과의 접촉이 많은 곳에 위치해 있다.

영추문은 6일부터 일반 시민에게 개방된다. 경복궁의 다른 출입문과 같이 입장료 3000원을 내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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