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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이야기] 고려 8대 현종의 목숨을 구한 승려…①진관동의 유래

서울의 서북쪽 끝, 북한산자락에 위치한 진관동. 그 위치 탓에 가장 늦게 서울로 들어온 마을이지만, 그 시작은 천 년 전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 왕건의 손녀, 경종의 비, 목종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는 왕위계승 1순위였던 대량원군 왕순(태조 왕건의 8남 왕웅의 아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사생아를 왕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숭경사(崇慶寺)에 보내 죽이려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보내 자객을 통해 죽이려 한다. 신혈사에서 홀로 수행하던 승려 진관이 이를 알고, 미리 대량원군을 숨겨주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량원군이 즉위하니 고려 8대왕 현종이다.

현종은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진관사는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주요 사찰로 그 명맥을 잇는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충신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진관사에 수륙사(水陸社)를 짓고 수륙재(水陸齋)를 거행하게 했고, 조선시대 내내 지속된다.

조성 중기를 지나면서 이 지역은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빠른 통신수단인 파발제를 시행했고, 이 지역엔 금암참(黔巖站)이 설치된다.

군사통신을 담당했던 금암참은 의주로 향하는 서발의 출발 지점으로, 행정명령을 담당한 연서역과 더불어 주요 역참으로 자리 잡는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 역참제도를 연구해온 조병로 경기대 교수는 "금암참이 의주로 파발의 노선이었기 때문에 사람과 물자의 교류 모두 활발했을 것"이라며 "교통뿐만 아니라 상업의 요충지가 되어 취락이 발달했다"고 분석했다.

그렇게 파발을 통해 성장한 마을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행정개편을 거치면서 하나의 마을로 발전했다. 원래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은방에 속했던 이 지역은 먼저 절의 옛 이름을 따 양주군 신혈면이란 이름을 얻는다. 이어 고양군에 편입되며 하도면과 이름을 합쳐 신도면이 되는데, 마을 이름은 파발의 전통과 진관사를 기준으로 구파발리와 진관내리, 외리로 불리게 된다.

이어 이 마을은 1973년 서울시 서대문구로 편입돼 은평출장소 구파발동, 진관내동, 외동으로 개편된다. 1979년엔 은평구로 분구되면서 구파발동은 법정동만 유지한 채, 행정동은 진관내동에 속하게 된다. 대신, 1985년 지하철 3호선 개통으로 지하철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때 정해진 이름이 구파발역이다.

2003년엔 은평뉴타운 개발 결정되었고, 주거단지 변화에 따라 2007년 진관내동과 외동이 통합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으로 법정동과 행정동 명이 같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 골목이야기 시리즈 '진관동'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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